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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식 농사

    어린 시절에는 엄마가 예쁘게 차려 입고 학교에 자주 오는 아이, 그래서 엄마가 다녀간 날에는 선생님이 특별히 신경을 쓰는 것이 눈에 보이는 그런 아이들이 부러웠다. 그러다가 10대에는 공부 잘하는 아이가 부러웠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는 했다고 자부하지만 그래도 학교에는 나보다 좀더 잘하는 아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다 20대에는 예쁜 아이가 부러웠다. 학교의 킹카들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어디를 가나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 부러웠다. 그러다 30대에는 자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살림살이와 직장 생활 사이에서 쩔쩔매던 나로서는 가정 생활도 지혜롭게 잘 하면서 또한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러다가 40대가 된 지금, 그것도 초반과 중반을 지나 40대 후반으로 가려고 하는 요즘은 자녀가 잘 자란 가정이 제일 부럽다.

    물론 아이를 기르는 엄마로서 공부를 잘 하고 학교에서 똑소리나게 생활하는 아이가 부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아이보다는 신앙이 확실한 아이,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는 아이, 친절하고 겸손한 아이,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하는 아이를 보면 그 아이들의 부모가 정말로 부러워진다. 아이를 한 둘도 아니고 넷씩이나 길렀으면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자녀 교육의 노하우가 있을 법도 한데 아이들이 자라면 자랄수록 노하우는 커녕 자식 농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더 크고 강하게 드는 것은 왜일까.

    어떤 부모는 자신이 배우지 못한 것이 평생 마음에 걸려서 자식만큼은 어떻게든 많이 배우게 하려고 공부 공부하며 강조했더니 아이는 부모의 보상심리 때문에 상처받았다며 집을 뛰쳐 나간다. 어떤 부모는 어릴 때 너무 가난했던 자신의 삶이 한스러워 아이에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다 사주었더니 아이는 아무런 의욕도 없을 뿐 아니라 아무 것도 소중한 것이 없는 아이가 되었다. 자식만큼은 고생을 시키지 않으려고 부모는 뼈가 가루가 되도록 일하면서 자식이 힘들까봐 어려운 것은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고 자식은 그저 편하고 자유롭게 키우면 잘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자식은 책임감도 없고 자신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알아서 하지 못하고 언제나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책임감 있는 아이가 되라고 좀 엄하게 기르면 아이는 부모 때문에 주눅이 들어서 어디 가도 기를 못펴는 아이가 되었다고 하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면 좋다고 해서 아이가 하는 일에 다 칭찬하고 격려했더니 아이는 무엇이든지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왕자병 공주병에 걸린 교만한 아이가 되기도 한다. 사랑을 듬뿍 주면 과잉 보호라 하고 엄하게 키우면 애정 결핍이라고 하니 도대체 자녀는 어떻게 키워야 하는 것인지.

    우리는 주변에서 부모는 참 괜찮은 사람인데 자녀들이 의외로 아직까지 철이 안난 경우를 본다. 성경에서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많은 신앙의 거장들이 의외로 자식 농사에는 실패한 것을 보게 된다. 다윗이 그러했고 사무엘이 그러했다. 그런가 하면 부모 없이 외롭게 자란 사람이 정말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결혼한 이후의 자신의 가정을 잘 꾸려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돌봐 주는 사람 없고 누구 한 사람 챙겨주는 사람 없었지만 어린 나이에도 비뚤어지면 안된다고 자신을 애써 채근하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인생을 배운 사람들이 있다. 으리으리한 공부방에 멋진 책상을 사주어도 공부 안하고 농땡이치는 자식이 있는 반면 학비가 없으니 제발 공부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려도 끝까지 열심인 사람도 있다. 성경의 열왕기서를 보면 아버지는 하나님 안에서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지만 그 자식은 완전히 영적으로 타락한 경우도 있고, 그와 반대로 부모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했지만 그 자녀는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와 부흥을 경험하기도 한다. 결국 자식 농사는 부모의 소원대로 부모의 기대대로 부모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자식 농사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내가 아무리 좋은 부모가 되고 싶어도 내 힘으로는 잘 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기윤이는 오케스트라 연습 때문에 수요일마다 학교에 첼로를 가지고 간다. 보통 때는 집에까지 걸어오니까 별 문제가 없지만 수요일만큼은 첼로가 무겁기 때문에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가야 한다. 그런데 나는 수요일마다 심방이 있기 때문에 아이의 하교길에 픽업을 하기 어려운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수요일 아침마다 그날 심방 약속을 보고는 아이에게 오늘은 엄마가 픽업을 할 수 있으니 첼로를 가지고 학교 앞에 서 있으라 한다든지, 아니면 오늘은 곤란하니까 내일 가지고 오라든지 하는 이야기를 한다. 목요일에 아이의 첼로 레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수요일 오후에 집에서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그날은 수요일이지만 심방이 없었다. 그래서 그날은 아이를 데리러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아이가 첼로를 가지고 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침에 첼로를 차에 싣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둘째 예린이가 발을 삐어서 걷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학교로 데리러 갔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 한참 있으니 기윤이가 땀에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들어서는데 그 아이의 어깨에 무거운 첼로가 달려 있는 게 아닌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더욱 놀란 것은 엄마가 예린이 누나를 데리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할 때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미안하고 황당했는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거운 첼로를 든 채 길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 기다려도 엄마가 오지 않자 할 수없이 첼로를 어깨에 맨 채 길을 따라 걸어오는 아이의 모습, 그러다 엄마 차를 발견하고 반가와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아이의 함박 웃음, 그러나 무심한 엄마는 그냥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고 혼자서 그 무거운 첼로를 매고 집에 까지 힘겹게 걸어오는 아이의 모습, 아이는 어쩌면 엄마가 다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행여나 행여나 했지만 결국 엄마는 오지 않고 집에서 자기를 보고서야 깜짝 놀라는 엄마를 바라 보았을 때의 그 아이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날 나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나는 아이에게 참 좋은 엄마가 되어 주고 싶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누나처럼 때로는 할머니처럼 포근하게 언제나 따뜻한 빛과 사랑을 주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 그러나 내가 되고 싶다고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도 난 길에 선 내 아이를 보지 못했고 아이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지 못했으며 아이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나의 한계였던 것이다. 난 그날 아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그날 이후로는 더욱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모습과 아이들의 필요가 내게 보이게 해 달라고.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감정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아이들의 필요가 내 눈에 보이게 해 달라고. 난 지금 잘 하고 있다고 방심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분명히 알 수 있는 엄마가 되게 해 달라고. 그래서 정말 좋은 엄마가, 정말 필요한 엄마가 되게 해 달라고. 어느 부모가 나는 이 정도면 좋은 부모 되기에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매달려서 하나님이 그 아이를 축복하시도록,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좋은 부모가 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수밖에 정말 다른 묘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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