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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을 망칠 권리

    항상 늦잠을 자는 아들 때문에 여간 불만이 아닌 엄마가 있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항상 지각이라고 소리를 질러야 일어났고 대학생 때에는 아예 시간표를 조정하여 수업을 다 오후로 내몰았다. 아무리 그래도 직장 생활을 하면 좀 나아지겠거니 했지만 파트타임이었고 또 그 시간이 오후부터라 계속 늦잠을 잤다.

    그 아들의 부모는 거의 30년동안 함께 살아온 부부였다.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는 사이여서 언성을 높일 일은 별로 없었지만 아들의 늦잠 때문에 다투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깨우려고 하면 할수록 아들은 오히려 자기가 어린애냐고 역정만 내었고, 늦잠 때문에 아침에 꾸중을 들은 날은 아예 부모와는 대화도 하지 않으려고 해서 관계만 더 나빠질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아침을 망칠 권리는 없다.” 자신은 엄마로서 아들이 맑고 깨끗한 하늘을 보며 산책을 했으면 한다. 달리기도 하고 땀도 내고 아침의 맑은 정신으로 책도 읽었으면 한다. 정원 관리를 하다보면 내다버릴 쓰레기도 많고 때로는 무거운 나무둥치나 돌을 옮길 일도 있는데 그럴 때는 힘이 좋은 아들이 나와서 좀 도와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아들은 자고 있다. 그래서 아들에게 잔소리를 하면 아들아이의 기분이 나빠질 뿐만 아니라 자기 기분도 나빠진다. 결국 아들의 습관은 고치지도 못하면서 서로의 관계만 해칠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침마다 이 말을 반복한다고 한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아침을 망칠 권리는 없다.” 그 후 그녀는 아들의 늦잠에 대해서 마음이 많이 너그러워졌다고 한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아침을 망칠 권리는 없다.” 이 말은 아이가 넷이나 되고 일곱 식구가 복닥거리고 사는 우리집 같은 경우에는 정말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할 말이다. 예전에 우리가 알바니에 살 때 우리 아이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인터, 칼리지에 각각 다니고 있었다. 아침마다 네 아이를 픽업하려면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한 명이 차에 올라탄다. 두 명, 그리고 세 명이 차례로 차에 올라탄다. 그래도 한 명이 나오지 않는다. 어서 나오라고 빵빵 신호를 보낸다. 겨우 네 명이 다 올라타면 그제서야 급하게 출발한다. 우리집 앞에는 라운드어바우트가 있다. 막 그곳을 돌려고 하면 “엄마, 미안해요, 나 숙제 안가지고 왔어요.” 누군가가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도리없이 차를 돌려서 다시 집으로 가야 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지각할 것같다. 시간에 늦는 것을 무지 무지 싫어하는 나는 속에서 고함이 터져나온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아무리 좋은 말이고 꼭 들어야 할 말이라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아침을 망칠 권리는 없다.

    얼마전 일만 해도 그렇다. 아이들 도시락을 준비하다 보니 일어나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막내가 일어나지 않는다. 가보니 아직도 자고 있다. 흔들어 깨워도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운지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고 말해주었더니 어젯밤에 숙제하느라 새벽 3시가 넘어서 잤다고 했다. 순간 숙제는 미리 미리 해두지 뭐했느냐고 야단칠 말이 목에까지 갈랑거리지만 꿀꺽 삼켰다. 그대신 “아이구, 피곤하겠네. 그래 숙제는 다 했니? 대단하다.”라고 말한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아침을 망칠 권리는 없다.

    모든 관계에는 파워가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부모가 가지는 파워는 아주 대단하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지시하고 명령한다. 때로는 아주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때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아이들의 마음을 심히 불쾌하게 만드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인종차별이 얼마나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지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가 우리를 비인격적으로 대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한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자녀들에게 모욕감을 주고 그들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는지 모른다.

    예수님은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부모된 우리가 자기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 자녀가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자라도록 훈련시킬 수 없다. 많은 부모들이 개나 고양이와 같은 애완동물을 사랑하듯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개나 고양이는 주인의 뚯에 100% 순종한다. 만약 애완동물이 주인의 뜻에 반항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집에서 키울 이유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든지 아니면 버리고 만다. 부모들 중에는 아이가 어릴 때에는 너무 너무 예뻐하다가 아이가 자라서 10대가 되고 자기의 의견을 가지게 되고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게 되면 그들의 성장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킴으로써 자신의 파워가 흔들리는 것을 봉쇄하는 경우도 있다.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은 단순히 먹여주고 입혀주는 그 이상의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애완동물을 기르면서 들이는 그런 정도의 노력으로 자녀들을 훈련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대단히 비인격적인 방법으로 자녀들에게 인격적인 성품을 가르치려고 하는 모순을 범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부모인 내가 그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자녀들에게 얼마나 거칠고 은혜롭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지 모른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아침을 망칠 권리는 없다. 누구도 비인격적인 방법으로 인격적인 성품을 가르칠 수 없다. 자신은 참지 못하고 화를 쉽게 내면서 분노를 다스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 자신은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에 성실하지 못하면서 자녀들에게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하라고 가르칠 수는 없다. 자녀는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운다. 그것이 부모된 우리가 가장 잊지말고 기억해야 할 진리이면서 동시에 가장 쉽게 잊어버리는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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