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here:
  • 생명의 봄 영혼의 봄

    라일락 대신 라벤다가 피고 개나리 대신 코파이가 피는 나라에서 스무 번째 봄을 맞는다. 겨우내 마른 몸으로 버티어 온 마디 마디마다 생명의 움이 돋을 때의 그 황홀함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생명은 저토록 찬란한 것이어늘 새삼 생명에 대한 겸허한 감사가 마음에 차곡차곡 쌓인다.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생명의 신비가 흘러넘치고 있는데 이 아름다운 거리를 지나는 내 마음은 왜 이렇게 자주 우울해지는 걸까. 렌트비를 내지 못해 쩔쩔 매는 사람들. 이곳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해 결국 한국으로 돌아간 남편이 여전히 일자리가 없어서 생활비를 보내지 못하는 가정들의 이야기. 하루종일 손님 하나 얼씬하지 않는 가게에서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꺼내 먹는 남편들의 허탈한 손. 존재하면서도 마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림자처럼 살아야 하는 사람들…

    이지선 자매 생각이 난다. 대학교 4학년이던 2000년. 한 음주운전자가 낸 6중 추돌 사고로 화염에 휩싸인 자동차에서 간신히 끌어내어졌을 때 그녀의 인생은 서서히 막을 내리는 것 같았다. 온 몸에 화상을 입고 그로 인해 손마디까지 잘라내야 했던 이지선 자매. 그러나 오늘 “누군가 사고가 나기 전의 그때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이젠 ‘아니다’라 대답할 것”이란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복도에서 마주친 아이가 “ET다”라고 소리치며 놀라 도망가는 그 얼굴을 하고도 감사할 수 있고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고 기다림마저 잃어버렸을 때에도 봄은 온다. 만약 우리 인생의 봄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다면 그때에도 과연 우리는 이 땅 뉴질랜드를 선택할까. 뉴질랜드에 살기 때문에 더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노란 얼굴부터가 이방인이라고 말하는 이 거리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것없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고 나를 아무것도 아닌 듯이 취급하는 이 사회가 나를 분노하게 하더라도 이곳에서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이 너무 감격스럽기 때문에 진정으로 감사하고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전혀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없었는데 이민을 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리워서 혹은 이민사회의 정보를 얻기 위해 교회에 왔다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하나님을 만난 그 감격 때문에, 한국에서는 모태신앙이라든지 수많은 교회활동 등 자랑스럽게 걸치고 있던 모든 것이 껍질처럼 말라서 바스락거리고 나의 전존재가 벌거벗은 듯이 수치스럽게 드러날 때 눈물 속에서 다시 만난 하나님을 결코 놓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 그 옛날로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봄은 이제 엄마를 따라 산책나온 개구쟁이의 자전거 바퀴에 매달려 한가하게 구르고 있다. 갑자기 옆집 처마 밑이 부산해진다. 엄마 아빠 새가 먹이를 물어온 것이다. 새끼를 향한 그들의 사랑을 보며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한다. 시간을 새롭게 하려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도리밖에 없다. 문제가 심각해질수록 더 간절히 하나님을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 영혼에도 반드시 봄이 오리라.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