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here:
  • 새해 아침의 기원

    한 바탕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기분이다. 그 일은 어느날 아들과 함께 외출을 나갔다가 점심 때를 놓쳐버렸고 그래서 오후 2시가 훌쩍 넘어서야 KFC에 가서 허겁지겁 점심을 먹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날부터 아이는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낮에는 연말이라 여러 가지 일들로 바쁜 엄마 아빠가 없는 빈 집에서 혼자 내내 토했다. 나는 아이와 함께 밤을 보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아이의 손을 잡고 기도해주는 일밖에 없었지만 낮에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혼자 괴로워했던 아이가 혼자 밤을 보내는 것은 또 다른 아픔일 것만 같아 아이 옆에 같이 있어주고 싶었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시간 동안 나는 여러 가지 모임으로 바쁜 하루 하루를 보냈다. 나 역시 제대로 잠을 못잔 상태라 내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다 사그라드는 듯했고 특히 아이가 침대에 누워있는데 집을 나가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일 이후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생겼다. 다들 말하지 않은 속사정이 있을 것같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어제밤 아무 일이 없었을까? 어제밤 외롭지 않았을까? 힘들지 않았을까? 지금 저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도 어제밤에는 너무 외롭고 힘들고 아파서 눈물지은 것은 아닐까.

    문득 지나간 일들이 바람처럼 지나간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한 아내. 뉴질랜드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남편은 아무런 말도 없이 며칠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그녀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런가하면 부부가 심하게 싸우다가 남편이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려고 하자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경찰을 불렀던 것도 어느날 밤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어떻게 아버지를 고발할 수 있느냐고 흥분했고 결국 아버지와 아들이 영영 등을 돌린 것도 그날 밤이었다.
    아이의 머리에 열이 있어서 걱정스런 마음으로 약국에 들어서는데 등 뒤에서“여보”하고 부르는 절박한 목소리가 있었다. 놀라서 뛰어가 밝은 가로등 아래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그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어찌나 민망한지 그도 나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날 밤 그 남자의 아내는 어디로 간 걸까.
    새벽 1시에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 울음을 터뜨린 여자도 생각난다. 자기는 열심히 일한 것밖에 없는데 자신이 그 가게의 세금관계 비리를 잘 알고 있는 것이 겁이 난 주인은 자기를 도둑으로 몰아 내쫓았다고 한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세무서에 전화를 할까 하고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이 먼 타국까지 와서 동포끼리 고발하는 그런 일만은 차마 할 수가 없어서 결국 뉴질랜드를 떠난다고 했다. “난 너무 억울해요.” 그녀는 통곡하고 있었다.
    불면증의 고통. 밤새 잠이 오지 않아 어둠 속에서 허공을 쏘아보며 한 마리 두 마리 세기 시작한 양은 수천 마리가 되고 수만 마리가 되는데 점점 말갛게 비어져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오는 밤이 두려운 사람들이 있다. 밤새 사고를 당하고 혈압이 오르고 심장이 오그라들고 피가 거꾸로 돌고 죽을 것같은 고통에 구급차를 차고 허둥지둥 응급실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이런 밤을 보내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어제밤도 또 어제의 어제밤에도 누군가는 돌아눕지도 못할 통증 속에 밤을 새웠고 누군가는 겹겹이 쌓인 문제와 문제들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해 한숨으로 밤을 새웠으리라.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 사람의 주름 속에는 그만큼 아픈 이야기가 있겠지. 저 사람의 무표정 속에는 그만큼 외로운 이야기가 있겠지.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 그분은 단지 그의 이름만 부르신 것은 아니리라. 그의 존재를 불러주고 그의 아픔과 슬픔 외로움과 희망도 함께 불러 주셨으리라. 그렇다면 우리도 이제 다른 사람의 존재를 불러주자. 그 사람의 얼굴과 이름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와 아픔과 외로움도 함께 알아가자. 그의 고통과 좌절을 함께 아파하고 그의 희망과 소원을 함께 기뻐하자.

    새해이다. 올해에는 우리 서로에게 마음을 열자. 어제밤이 끔찍했던 사람들, 어제밤이 힘들고 외로웠던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자. 힘들었겠다고, 외로웠겠다고, 그래도 힘을 내라고 말해주자.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라”(시편 30:5)는 말씀을 믿으며 비록 지난 한 해는 힘들었고 어제밤은 고통스러웠을지라도 오늘은 그리고 올 한 해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함께 웃을 수 있음을 믿으며 살자.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