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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시작 앞에 서서

    오래된 사진첩을 넘긴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휙휙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세월. 사진첩 몇 장만 넘기면 포대기에 싸여있던 내가 걸음마를 하고 학교를 다니고 결혼을 한다. 10년 세월도 20년 세월도 사진첩을 넘기듯 그렇게 지나갔구나. 그러고보니 그동안 난 참 많은 시작을 했다.

    내 생명의 시작을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아쉽게도 내가 엄마의 몸 안에 생명으로 정착했던 때의 기억은 전혀 없다. 그때 들었던 엄마의 고른 숨소리와 탯줄을 통해 섭취했던 영양분의 달착지근한 맛을 기억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초등학교 1학년을 시작하면서 만난 “안다는 것의 환희”는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학교 길에 마주치던 간판이 읽어질 때의 그 기쁨, 가나다를 이제 막 배운 내가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여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기쁨을 넘어 경외요 신비였다. 그때까지 그림만 보던 내게 글자가 열어보인 세계는 비밀의 화원 그 자체였다. 단순한 물체에 불과했던 것들이 의미를 가지고 내게 다가올 때 돼지국밥집이 늘어서 있어서 예전에는 코를 막고 서둘러 지나던 그 거리의 간판이 내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고 그때의 희열은 두고두고 글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졌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3년 동안 입으려고 넉넉하게 맞춘 교복이 내 몸에 채 맞기도 전에 ‘나’라는 존재의 의미와 씨름했다. 내가 울면 세상이 울고 내가 웃으면 세상이 웃던 유년의 낭만주의는 끝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각자 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나는 삶의 끈을 놓고 말았다. 보다못한 담임 선생님은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 책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는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우주의 물 한 방울로도 죽일 수 있는 유약한 인간에게 과연 희망이 있는 것인지 묻고 또 물었다.

    진지한 학문의 맛과 함께 로맨스와 낭만 그리고 부마사태와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에 대한 지성인의 책임과 인간의 한계를 절감했던 상아탑 시절을 지나 시작된 결혼 생활은 전에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새로운 나의 모습과 맞닥뜨리게 했다.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30년 가깝도록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편과 함께 하는 한지붕살이는 쉽지 않았고, 때로 바늘 하나 꽂을 틈도 없이 좁은 나의 마음과 마주칠 때면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모른다.

    엄마로서의 시작이 있었다. 절벽에서 뚝 떨어지는 느낌과 지구의 중력이 한꺼번에 내게로 몰려와 나를 쓸어가는 느낌이 반복되면서 열도 없는데 마치 열병 환자처럼 끙끙 앓으면서 까무룩하게 눈을 감았다가는 놀라서 번쩍 뜨기를 반복하며 밤을 새웠다. 내가 왜 이럴까? 무슨 큰 병에 걸린 건 아닐까? 다음날 병원에 가보니 임신이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네 아이 엄마로서의 삶은 기쁨과 함께 인내 위의 인내를 배우게 했다.

    새로운 나라 뉴질랜드에 발을 내디딘 이민의 시작이 있었다. 북반구가 아닌 남반구, 북두칠성 대신 남십자성이 빛나는 나라, 비서가 총장의 이름을 부르고 교수는 바닥에 앉고 학생은 소파에 앉고, 전기 스위치 켜는 것부터 시작해서 운전 방향, 생활 습관 등등 무엇 하나 같은 것이 없는 낯선 땅에서의 시작은 처음에는 무척 신기했지만 얼굴 색깔부터 이방인이라고 말하는 거리에서 살아남기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었고 가까이 갈수록 높아지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 앞에 지독한 피해의식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제 또 하나의 시작 앞에 섰다. 글을 쓰고 내 이름이 인쇄된 책을 낸다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 앞에 선 것이다. 두렵고 긴장도 되지만 흥분과 살아있음을 느낀다. 사랑하는 남편과 나의 네 자녀들, 그리고 부모님, 또한 나를 격려하고 내게 마음을 열어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이 글을 통해 누군가 또 하나의 행복한 여자가 되어감으로써 나를 사랑하는 분들에게 진 사랑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았으면 참 좋겠다.

    2012년 성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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