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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은 조용합니다

    시드니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찬 리뷰>에서 호주 NSW의 주정부 토지국에서 23년째 근무하는 한국 교민 박영주씨의 기사를 읽었다. 1965년 한국에서 태어난 그녀가 생후 5개월이 되었을 때 열이 심하게 오르자 어머니는 그녀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으나 결국 청력을 잃고 말았다.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던 그녀는 자연히 아무 말도 배울 수 없었고 동네 아이들은 벙어리라고 놀려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박영주씨의 어머니는 딸을 위해 눈물의 밤을 지새워야 했다. 수화를 배우면 당장은 의사소통에 불편함이 없겠지만 앞으로 영원히 소리를 낼 수 없다는 말에 아이를 구화학교에 넣었고 새벽부터 밤까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의 길을 걸어야 했다. 헬렌 켈러가 그러했듯이 박영주씨 역시 어머니와 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본인의 피눈물나는 노력에 의해 서서히 다른 사람의 입모양을 보고 소리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목소리로 다른 사람과 전혀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을 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부터 정상인과 같이 보통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한국 사회의 장애에 대한 편견과 모욕으로 인해 박영주씨의 가족은 결국 그녀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호주로 생활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호주 학교의 선생님들은 수염을 기른 사람들이 많아서 입모양을 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박영주씨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래 저는 입모양을 보고 말을 들었는데 호주에 왔을 때 선생님들이 콧수염이 있어서 입모양을 읽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를 위해 선생님들이 콧수염을 밀어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장애자를 위하여 말입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만약 누군가가 그 선생님들에게 어떻게 콧수염을 밀 수 있었느냐고, 콧수염을 기르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데 어떻게 그것을 밀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분들은 뭐라고 말할까?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너무 추켜 세우지 말라고 오히려 계면쩍어 하셨을 것이다. 콧수염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라는 것이니 선생님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이 정성스럽게 가꾸는 것이나 자신이 자랑스러워 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들의 배려가 감동스러울 수밖에 없다.

    사랑은 조용하다.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준 박영주씨의 선생님들은 조용히 자기의 사랑을 실천했을 뿐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오래 간직하지도 않을 작은 친절이나 도움을 베풀고도 자기 선전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사야42:1-3)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은 참 가치있고 보람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친절을 베푼 사람이라면 조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알려야 한다. 따라서 기회만 되면 자신의 업적과 활동을 자랑하게 된다.

    A와 B 두 사람이 낚시를 갔다. 물살이 세고 고기가 많이 몰리는 포인트로 간 그들은 그날따라 더욱 험한 파도에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A가 파도에 휩쓸려 물로 빠지는 순간 B가 그를 간신히 붙잡아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그 과정에서 A는 물론이지만 B도 손바닥과 무릎이 까지고 얼굴에도 피가 흐르는 상처를 입었다.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A는 B가 자기 생명의 은인이라고 거듭거듭 감사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B는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자기가 어떻게 A의 생명을 구했는지 그 무용담을 말했다. 처음에 A는 B의 말에 100% 동의를 하면서 듣고 있었지만 그 횟수가 잦아지고 또한 B의 말이 조금씩 과장되기 시작하자 B에 대하여 실망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 말을 듣는 사람마다 A에게 B가 생명의 은인이니 무조건 B를 잘 모셔야 된다고 하자 견딜 수 없었던 A는 결국 이민을 가고 말았고 그 뒤로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다.

    어느 교회의 중등부에서 선생님이 자기 반 학생 앞에서 한 학생을 칭찬했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어떻게나 다른 친구들을 잘 섬기는지 선생님이 보기에도 너무 대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학생은 손사래를 치면서 정색을 했다. “선생님, 저를 칭찬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칭찬하시면 나중에 예수님께 받을 상이 없잖아요.”

    사랑하는 가족은 참 아름다운 공동체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 연약한 존재이다 보니 서로 사랑한다 하면서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도 부모는 걸핏하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하며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편한 책임을 자녀에게 전가시킨다. 부부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당신을 위해 이러이러한 희생을 했다. 그런데 당신이 나를 위해서 한 일이 뭐냐?” 하며 자기가 입은 손해를 보상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키울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을 행동을 하고서도 사람들에게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빙그레 웃는 사람이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자녀를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키우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가도록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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