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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이 왜 불행하게 사는가?

    초콜릿을 원하는 어린아이가 고집스럽게 짜증을 낸다. 10대가 된 자녀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까칠한 청춘남녀는 서로 까다로운 요구를 한다. 노인들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른알기를 우습게 안다며 한숨을 짓는다. 이들이 보내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나의 행복을 가로채지 마!”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행복하다고 느낀다. 부모는 자녀가 부모의 원대로 살아주기를 고집하고 자녀는 자녀대로 부모에게 반항한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실망하고 또한 우리를 통제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위협을 느낀다.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이유는 삶의 중심에 “자기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행복에만 집착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도 불행해질 뿐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을 가로막는 방해군이나 걸림돌이 되고만다.
    나의 행복을 위한 선택의 증상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자기 권리주장이다.
    “나는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어!” “그것을 할 권리가 충분히 있어!”
    객관적으로 보면 그럴 권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늘 불만족상태가 될 것은 뻔한 이치다. 권리를 말하자면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이 원하는 초코렛을 사달라고 조를 권리가 있는가? 몇 십 년동안 자녀를 양육했다고 부모가 자녀에게 자기 말대로 하라고 주장할 권리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주변사람이나 환경이 나의 계획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불만족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둘째는 관계장애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다보면 불쾌감,비난,상처,분노,실망, 원한, 울분을 경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행복에만 집착하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나를 기분좋게 해주고 직장상사까지도 내가 아침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다가 만약 상처입고 거절당하고 환멸을 느끼면 더 이상 그 사람과 관계맺기를 거부한다. 대신 분노하고 보복을 준비한다.

    셋째는 통제욕구이다.
    우리의 결정적인 실수는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조정해야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배우자도,자녀도,친구도,국가정책도,나아가 하나님까지도 내 맘대로 통제해야 직성(?)이 풀린다. 부모는 자녀를, 자녀는 부모를 통제하려고 한다. 또한 적지 않은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통제할 욕심으로 돈을 벌고 권력을 얻으려고 시도한다.

    넷째 분노이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분노한다. 물불 가리지 않는다. 분노의 수준이 급기야 자기혐오까지 이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 분풀이한다. 총격난사를 하고 묻지마 살인을 하다보니 선량한 시민들이 분노의 대상으로 쓰러진다. 그들은 세상이 자신들의 기분을 채워주지 않고 하나님도 자기의 욕구를 다 채워주지 않기 때문에 세상과 하나님께도 분노한다.
    다섯째,피곤한 삶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제대로 되지 않을 때 찾아오는 총체적인 증상은 피로감이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각양각색으로 시도하다보니 분주하기 이를 데가 없다. 항상 더 열심히 일해야하고 더 잘해야 한다. 그러니 피곤한 인생이 되고만다.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불행의 시작은 무엇때문일까? 나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불행이 나의 행복 추구에서 시작되었다면 이제부터는 나의 행복대신 다른 존재를 위해 살면 어떨까?
    놀랍게도 성경은 우리 인간의 행복은 인간을 위해서 살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인간의 최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최고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제 1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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