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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록 내가 원한 인생이 아닐지라도

    모든 존재는 이름이 있다. “그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싯귀처럼 존재와 이름은 함께 한다. 그래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 부모들은 아이에게 합당한 이름을 짓느라 고심한다.

    성경에는 모세의 두 아들의 이름이 나온다. 모세가 지은 그 아들들의 이름은 “게르솜”과 “엘리에셀”이다. “게르솜”은 “내가 이방에서 객(客)이 되었다”라는 뜻이고 “엘리에셀”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는 뜻이라고 한다. (출18:3-4)

    모세의 두 아들의 이름을 곰곰이 묵상하면 모세의 인생이 그대로 드러난다. 모세는 첫 아들을 낳았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달라진 환경에 대하여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자기가 이런 신세가 되고 말았나. 당시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이집트 궁정에서 왕자로 자란 자신이 아닌가. 자기 동족을 학대하는 이집트인 한 사람을 죽인 대가로 도망자 신세가 되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곳에서 세월을 낭비하고 있다. 그것이 너무 억울하고 너무 분해서 자신의 가슴을 치며 절망과 탄식 속에 고통하는 모세의 모습이 게르솜이란 아들의 이름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다가 세월이 더 많이 흘러서 둘째 아들을 낳았을 때 모세는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잃은 것을 한탄했다. 잃어버린 지위를 아쉬워했고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 사람을 원망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서 신세타령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남은 것을 감사했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의 생명 뿐이었다. 그는 양을 치고 있었지만 그것도 장인 이드로의 양이었으니 사실 그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자기 한 목숨이 남아 있어서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을 감사했다. 그래서 엘리에셀이라는 아들의 이름 속에는 모세가 자신의 인생을 수용하고,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을 감사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비록 자신이 원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그 모습 그대로 감사할 때 그때 비로소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입게 된다. 그래서 게르솜의 주어는 “내가”이지만 엘리에셀의 주어는 “하나님이”이다.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결혼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배우자에게 끊임없이 불평을 한다. 누군가에게 완전히 속은 기분이다. 나만 빼놓고 세상이 모두 짜고서 나를 속인 것같은 배신감과 함께 자기 연민에 빠진다. 배우자에 대한 원망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귀착된다. 내가 눈이 삐었지. 어쩌다 이런 사람을 만났을까. 남들은 잘도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나는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고 만 것일까. 사람도 만나기 싫고 살아갈 의욕도 없다.

    그러다가 서서히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이건 분명히 내가 원한 인생이 아니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그런 다음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것도 없다고 한탄하던 자기에게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그것이 참 감사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붙들고 있었던 것이 다 허상(虛像)이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다 .

    우리의 인생과 결혼생활은 “내가”에서 “하나님이”로 가는 과정이다. 끝까지 “내가”에만 머물면 자기연민으로 인생이 마감된다. 비탄과 슬픔과 쓴뿌리만 가득한 척박한 땅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이”라고 인식하게 될 때 그 척박한 땅에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씨앗이 뿌려진다. 그리고 그 씨앗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 수 있게 된다.

    우리 인생이나 결혼생활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라고 한다. 참 맞는 말이다. 결혼생활의 목적이 행복이라면 나는 너무 억울하다. 나만 왜 참고 살아야 하고 나만 왜 이런 환경 속에 살아야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나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내 인생이 왜 행복하지 않은 것일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기연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의 인생과 결혼생활의 목적이 거룩이라면 이제 서서히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비록 나의 배우자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녀가 속을 태우고 주위 사람들이 나를 비난해도 그들이 나를 거룩하게 만드는 도구임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들에 대해 분노하기 보다 불쌍한 마음이 든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요, 하나님, 이건 내가 원한 인생은 아니지만 이것을 통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기를 원하신다면 잘 살아볼게요. 힘 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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