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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일 사진

    한국에 김미경 원장이란 분이 아침마당이란 프로그램에 나와서 강의를 하던 중 이런 말을 했다. 아이는 속을 썩이고 마음 고생을 시켜도 자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그 아이의 백일 때 얼굴이 겹치면서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여드름이 숭숭 난 얼굴인데도 어쩌면 그 얼굴이 그렇게 귀여워보이는지. 그 속에 백일때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은 다르다. 잠에 골아떨어진 남편 얼굴 보면 정나미가 더 떨어진다. 그속에는 백일때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열 달동안을 배 속에 넣고 키우고 낳아서 또 끼고 살고 키운 자식과 남편은 그래서 다른가보다.

    부부간에도 리모델링이 필요하다는 책에서 최성애씨 역시 그런 제안을 하고 있다. 안방에 남편의 백일때 사진을 두면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화해할 때 확실한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남편의 어릴 때 얼굴을 보면서 그래 남편은 참 귀여운 사람이야. 좋은 사람이야. 공연히 이 일을 크게 생각하지 말고 조금씩 양보하자. 이렇게 마음이 부드러워진다고 했다. 결국 어린아이의 얼굴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참 귀엽다. 아이를 양육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가 한둘도 아니고 넷이나 되는 나는 자녀양육이 참 버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들과 함께 있는 부모는 참 행복해 보인다. 아이의 기저귀가 마당에 하얗게 널려있어서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부대끼는 가정은 참 행복해 보인다.

    어린아이들이 등장하는 유머가 많다. 그런 유머 속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들은 그 순전한 마음으로 어른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버스를 탄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저 할아버지가 귀에 낀 것이 뭐야?””귀가 잘 안 들리기 때문에 보청기를 끼신거야.” “응, 그런데 왜 돋보기 안경을 끼셨어?” “눈이 나쁘니까 쓰신 거란다.” 그러자 아이가 말했다. “아하, 그럼 저 할아버지가 모자를 쓴 것은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구나!”

    비오는 날 아이가 카세트를 틀어놓고 마루에 누워서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다. 조금 있다 엄마가 보니 이번에는 엎드려서 노래를 하는 게 아닌가? 이상해진 엄마가 물었다. “얘, 조금전에는 누워서 하더니 힘들게 왜 엎드려서 노래를 부르니?” “엄마, 그것도 몰라요? 아까는 앞판 노래구요, 지금은 뒷판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학교 선생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우리 땡구가 감기 때문에 아파서 오늘 학교 못갑니다.”
    “그런데 누구세요?” “예, 우리 아버지입니다.”

    어느 엄마가 아이에게 헛간에 가서 비짜루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무서워진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정말 하나님은 못하시는 게 없어요?” “그럼” 아이는 뒷문을 열고 말했다. “하나님, 거기 헛간에 비짜루 좀 갖다 주세요.”
    어느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정말 하나님은 안계신 곳이 없으세요?” “그럼”그러자 아이는 자기가 들고 있던 컵의 입구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말했다. “잡았다!”

    아이들은 참 천진난만하다. 아이들은 잔꾀를 쓸 줄 모른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가 다 잘해주는데 아이들은 아픈 체를 못하고 조금만 몸이 나으면 대번에 웃으면서 뛰어다닌다. 그러나 아이들의 유머가 다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느 엄마가 2층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집이 무너지는 듯한 큰소리가 들렸다. 트럭이 실수로 집 울타리를 들이받은 것이다. 깜짝 놀란 엄마는 아이가 걱정이 되어서 큰소리로 불렀다. “돌구야! 돌구야!” 그때 저쪽 방에서 돌구가 하는 말. “엄마 내가 안그랬어요!”
    이 유머를 읽고는 처음에는 웃었는데 나중에는 눈물이 났다. 왜 어른들은 모든 것을 아이들 탓을 하는 것일까? 불행한 결혼을 계속 하는 것도 아이탓이고 내 인생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도 아이탓이고 자존심 세우며 살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도 공부 못하는 아이 탓이고 집안을 우아하게 가꾸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것도 마구 어질기만 하는 아이 탓이고 이것도 아이탓 저것도 아이탓으로 돌리고 있지는 않나?

    아버지가 항상 꼴찌를 하는 아들에게 말했다.
    “이번 기말고사때 또 꼴찌를 하면 부자간의 인연을 끊겠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아들이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가 물었다. “시험은 어떻게 되었니?” 그러자 아들이 하는 말. “아저씨, 안녕하세요?”
    우리는 아이를 위한다고 하면서 아이를 위협하고 협박할 때가 많다. “너 자꾸 그러면 경찰 아저씨 불러올거야. ” “너희 둘이 그렇게 자꾸 싸우면 엄마가 집을 나가버릴거야.” 유머에서처럼 아이가 아버지를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부모가 만들어놓고는 정작 아이가 아버지를 아저씨라고 부르면 이제는 왜 그렇게 부르느냐고 호통이다. 그것 역시 아이 잘못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이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자. 그리고 말을 듣지 않으면 버린다는 둥, 너를 사랑할 수가 없다는 둥 극단적인 말을 삼가자.

    아이들을 꾸짖지 말라. 우리가 걸어온 길이다. 어른들을 욕하지 말자.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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