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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 잎새

    엄마가 기르시는 텃밭에 나가본다. 상치와 깻잎이 잘 훈련된 병사처럼 반듯하게 줄지은 저편으로 레몬 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 레몬 나무를 볼 때마다 브라질 작가 J. M. 데 바스콘셀로스 (Jose Mauro de Vasconcelos)가 쓴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가 생각난다. 사춘기 시절 그 작품을 읽을 때만 해도 라임이 레몬을 좀더 문학적으로 표현한 단어인 줄 알았는데 뉴질랜드에 와서야 라임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게 되었다.

    제제의 가정은 가난했다. 실직한 아빠와 방직 공장을 다니며 생계를 책임지는 인디언 엄마, 엄마의 벌이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가족들, 그리고 당장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야 하는 집안 환경은 어린 꼬마 아이들에게도 냉혹하다. 한참 장난도 심하고 궁금한 것도 많은 다섯 살 나이의 제제는 가족들에게 말썽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그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소외됨으로 인하여 받은 상처를 자신의 상상의 세계에서 치유한다. 라임오렌지나무에 생명을 불어 넣어 새 친구로 삼고, 집 뒷마당을 광활한 아마존 정글로 만들며, 서부영화 주인공들과 대초원을 달리며 들소 사냥을 한다. 이렇게 상상 속에서 외로움을 달래던 제제는 뽀르뚜가 아저씨를 만나면서 드디어 마음 속 가득 사랑을 채우게 된다. 그는 제제에게 또 다른, 어쩌면 진정한 아버지였다.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이 보여주는 나이를 초월한 우정은 읽는 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감동을 주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설명해 주마, 제제. 그게 뭔지 알겠니? 그건 네가 자랐다는 증거란다. 커가면서 네가 속으로 말하고 보는 것들을 ‘생각’이라고 해. 생각이 생겼다는 것은 너도 이제 곧 내가 말했던 그 나이…….”
    “철드는 나이 말인가요?”
    “잘 기억하고 있구나. 그땐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생각이 자라고 자라서 네 머리와 가슴 전체를 돌보게 되는 거야. 그땐 네 눈이 다시 뜨여 인생을 아주 새롭게 보게 될 거야.”

    우리집 레몬나무에는 새끼 손톱만한 레몬이 총총 달려있다. 문득 레몬이 익는 속도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생각들”이 부끄럽다. 새끼 손톱만큼 밖에는 자라지 못한 나의 생각들, 제대로 익지 못해 신맛과 떫은 맛만 나는 새끼 레몬같이 열리기는 열렸지만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 나의 생각들을 바라본다.

    우리집 레몬나무는 이파리가 푸르다 못해 시퍼렇다. 한 눈에 보아도 건강한 색이다. 우리말에 “벼는 농부의 발자욱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엄마의 텃밭과 레몬나무가 이렇게 잘 자라는 것은 순전히 엄마의 보살핌 덕분이다. 비록 햇볕이 종일 드는 곳도 아니고 땅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고 돌보는 엄마의 정성이 있기에 푸르게 잘 자라고 있다.

    레몬 나무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 본다. 다들 푸르고 시퍼런 이파리이지만 그 중에는 누런 이파리도 있다. 누런 이파리에 손을 갖다대면 건드리기도 전에 툭 떨어진다. 병든 이파리들은 그저 가지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일 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쉽게 떨어진다. 그러나 건강한 이파리들은 다르다. 힘을 주어도 잘 떨어지지 않을 뿐더러 일부러 떨어뜨리려고 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굳게 붙어있다. 건강한 이파리는 결코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생명의 결속력은 참으로 강하다. 결국 좋은 가정이란 결속력이 강한 가정이다. 아무리 아버지가 번듯한 직업이 있고 엄마가 요리를 잘해도 가족간에 결속력이 약한 가정은 누런 이파리와 같아서 외부로부터 오는 작은 영향에도 쉽게 해체되고 각자 떨어져 나가게 된다.

    결속력은 사랑이다. 오 헨리의 작품에 나오는 “마지막 잎새”는 사람이 만든 이파리라서 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꽁꽁 묶어 두었기 때문에 떨어질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베어먼 할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으로 잎새를 매달아 두었기 때문에 그 이파리는 비바람을 견디고 병든 수지를 생명으로 인도해 낸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결속력은 친밀감이다.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한다고 해도 항상 교훈조의 어투에다 잔소리로 나타난다면 친밀감을 가지기는 어렵다. 그럴 때 자녀는 부모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부부도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더 잘하라는 뜻으로 “당신은 이런 점을 고쳐야 한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하라” “반찬이 싱겁다, 짜다” 말하지만 그것은 충고가 아니라 비난이 될 수 있다. 계속적인 비난을 받으면서 친밀감을 가질 수는 없다. 결국 그들은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모든 사람은 결국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선택한다. 그러므로 교훈이나 충고보다 친밀감이 앞서지 않으면 건강한 가정이 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교훈이라고 생각하고 말해도 듣는 사람이 비난이라고 생각하면 교훈이 아니라 비난이 된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건강한 가정이란 친밀감의 바탕 위에 가족의 말을 적극적으로 경청해주고 내면의 헝클어진 실타래를 자신이 풀어가도록 옆에서 지지해주는 가정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을 때만이 존재 가치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이 거두어다가 불사르게 된다. 나는 지금 어떤 가지일까. 손만 대면 떨어지는 누런 이파리들처럼 조그만 유혹이나 시험이 와도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병든 가지는 아닐까. 나는 예수님과 얼마나 친밀함을 누리고 있는 걸까. 혹시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 불편한 것은 아닐까. 그저 예수님은 내 삶에 일체 간섭하지 않고 저만치 계시다가 내가 어려운 일이 있어서 “예수님”하고 부를 때만 마치 마징가 제트처럼 나타나셔서 내 삶의 모든 일을 해결해 주시고는 다시 저만치 거리를 두고 계시기를 원하지는 않을까. 누런 레몬나무 이파리를 보며 예수님과 나와의 친밀한 정도는 어떤 색깔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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