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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리와 구두

    우리집 둘째 예린이는 이제 대학교 2학년을 마쳤다. 원래 인정이 많고 다른 사람을 잘 도와주는 아이인데 요즘은 방학을 했기 때문에 집안일을 얼마나 잘 도와주는지 모른다. 얼마전에도 같이 부엌 정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갑자기 예린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갑자기 우스운 일이 생각났어?”하고 물었더니 어젯밤에 넷째인 예은이가 자신이 막내인 것이 싫다고 말했단다. 왜 싫으냐고 물었더니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여하튼 막내인 것이 싫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일 큰 언니가 되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첫째가 되면 role model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부담스러울 것같고 둘째나 셋째가 되면 좋겠다고 했단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예린이 자신도 예은이만한 나이 때, 인터를 다니던 열두 살 시절에는 자신이 둘째인 것이 무척 싫었다고 했다. 언니는 첫째라서 부모님이 기대하고, 셋째인 기윤이는 아들이니까 관심을 가지고, 넷째인 예은이는 막내라서 예뻐하는데 자기는 둘째라서 부모님의 관심 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린이는 이렇게 말했다.

    “난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정말이예요. 그러나 예은이 나이 때는 내가 둘째라는 게 싫었던 게 사실이예요. 그런데 예은이는 막내라서 싫다면서 둘째나 셋째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얼마나 우스워요? 왜 인간은 스스로를 다 불쌍하게 여길까요? 참 이상해요.”
    “그러게 말이야. 그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순이지. 한계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란 존재가 감사를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
    딸과 나는 인간의 그런 존재론적 모순이 다소는 재미있다는 듯, 그리고 그것이 말할 수 없이 기묘하다는 듯 다소 진지한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다.

    문득 둘째 아이를 출산한 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날이 떠올랐다. 예랑이는 그때 막 세 살이 되려고 하던 나이였는데 포대기에 싸여있는 동생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치이, 엄마는 언니 낳아달라고 했더니 동생만 낳고 있어.”
    세 살배기 꼬마의 마음에도 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을까? 결국 나는 언니를 낳아달라는 예랑이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고, 아이 역시 다시는 언니를 낳아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

    인간은 참으로 감사하기 힘든 존재이다. 이렇게 되었으면 행복할텐데, 저렇게 되었으면 감사할텐데 하는 조건이 너무도 길고 끝이 없기 때문에 감사하기가 참 어렵다. 다른 사람은 나를 부러워하는데 나는 내 속에 없는 것을 찾아 불평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배운 것이 적은 사람은 배운 사람을 부러워하고 배운 사람은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고 가진 사람은 비록 배우지는 못했지만 건강한 사람을 부러워한다.

    나도 한때는 나의 생명 자체에 대하여 감사하기 힘든 시절이 있었다. 좋은 남편 주신 것 감사하고, 착하고 예쁜 자녀들 주신 것 감사하고, 좋은 교회 주신 것 감사하면서도 정작 나의 생명 자체에 대해서는 감사하기가 어려웠다. 내 속의 엄격한 심판관은 내가 지나온 모든 순간 순간을 기억나게 하며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혹은 그때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며 잠시도 쉬지 않고 나를 압박했다.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나 자신의 환경 속에서도 정작 나 자신은 감사할 수 없었고 나의 완벽주의 병(病)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았다는 비관적인 결과를 내게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
    사람은 얼마나 감사하기 힘든 존재인지 모른다.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통제되어야 마음이 놓인다. 자신이 잘 되어야 하고 자신의 자녀가 잘 될 때 그때 비로소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마음이 높아져 있으니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 또한 자신의 잘못을 용서치 못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납할 수 없음에 괴로워한다. 자신은 결국 인간에 불과하며 인간은 허물 투성이의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은 그런 인간의 어그러진 범주에 들어가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 그것 역시도 얼마나 큰 교만인지 모른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간에게 감사를 가르칠 수 있다. 교만 덩어리, 허물 투성이, 부족함 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 때 만이 인간의 모든 교만이 녹아지고 자신에 대한 모든 채찍질이 거두어지면서 진정으로 그분의 품에 안겨서 감사를 고백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는 사람,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신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다리가 없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구두가 없음을 불평한다.”
    헬렌 켈러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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