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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려놓음

    우리 교회의 김은배 어르신이 십이지장암 선고를 받고 노스쇼어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 “암입니다.” 의사로부터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심정일까. 환자 자신과 가족들은 그 순간 입술이 바싹 마르고 털썩 주저앉고 싶지 않을까. 왜 하필 나일까? 나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왜? 왜? 누구에겐가 심하게 대들고 싶은 억울함이 불쑥불쑥 치솟지 않을까. 심방을 위해 병원에 들어서니 병원은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로 부산하다. 엘리베이트를 타니 배가 산더미같이 부른 여자가 남편인 듯한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서 있다. 순간 그녀에 대한 연민의 정이 마음을 저민다. 얼마나 힘들까. 그러고보니 나 역시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이 병원에서 우리 막내 예은이를 낳았다.

    노스쇼어 병원. 참 자주도 왔구나. 이곳은 엄마가 갑자기 심장에 이상을 느끼셨을 때 언젠가 한 번은 그런 날이 오겠지만 절대로 그날이 오늘이 아니기를 입술을 깨물고 기도하며 온 곳이기도 하고, 남편이 담석 때문에 고통스럽게 찾아와 한 밤 내내 모르핀을 맞은 곳이기도 하고, 족구를 하다가 넘어져서 가까운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심하게 떨면서 자꾸만 까무러치려고 하는 바람에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앰블런스를 타고 온 곳이기도 하다. 내목에 생선가시가 걸려서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앉아있던 곳이기도 하고, 아이들의 손목이 부러지거나 갑자기 호흡이 곤란하다고 해서 허둥지둥 찾아온 곳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수많은 성도들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고 어떤 분들은 이곳에서 임종을 맞기도 했다. 환자들을 심방하면서 그들이 속히 치유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곳임과 동시에 임종예배를 드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 곳. 생각해보면 뉴질랜드에서 살았던 20년 가까운 세월 속에는 이 병원도 한 부분을 자리하고 있었다.

    고백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노래 하나가 나를 따라다닌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농사하지 않으며 곡식 모아 김은배 어르신의 눈길은 참으로 선하게 보였다. 식욕도 없고 음식도 거의 드시지 못해서 기운은 없어보였지만 얼굴은 참으로 깨끗하셨다. 심지어 조금만 먹어도 배가 심하게 당기는 듯하면서 너무 고통스럽고 아프다고 말씀하실 때조차도 그분의 눈길은 선하게 여겨졌다. 병상에 있는 자들의 눈길은 어쩌면 저렇게 선(善)할까. 마치 초가을의 뜨락에 내리는 햇살과도 같이 조금은 쓸쓸하면서도 말할 수 없는 초연(超然)함을 안고 있는 그런 선함.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많이 누려야 하고 더 많이 쌓아두어야 한다는 모든 욕망을 내려놓은 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비밀스러운 평화.

    건강한 사람은 할 일이 많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인생에서
    ‘무엇’이 되어야 한다. 남편이 되어야 하고 아내가 되어야 한다. 직장에 나가야 하고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살아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하고 밥을 해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나 이미 짜여져 있는 촘촘한 시간표. 아침에는 이것을, 오후에는 저것을, 그리고 자기 전에 반드시 이것을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이 급하다. 속도를 초과해서 운전을 해야 하고 빨간 신호등인데도 지나가야 하고 지나가는 사람 어깨를 툭툭 치고도 미안하다고 말할 시간도 없고 느긋하게 줄을 서서 기다릴 여유도 없다. 빨리 가야 하고 빨리 해야 한다. 빨리 마무리해야 하고 빨리 다른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산다는 것은 어느 틈엔가 말할 수 없이 피곤한 경쟁이 되어 버렸다.

    문득 이 우주에서 오직 인간만이 “바쁘다”라는 말을 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가꾸시는 텃밭에 나가보아도 아무도 바쁘지 않다. 끊임없이 먹이를 찾아다니는 개미조차도 열심히 일하기는 하지만 바빠 보이지는 않는다. 단정하게 질서를 지키며 각자의 자리에 서 있는 상치, 고추, 쑥갓들도 분명 어제보다 더 자라있지만 날마다 푸르러갈 뿐 어서 빨리 커야지 끙끙거리지는 않는다. 할 일 없이 오가는 고양이들의 게으른 하품과 풍뎅이의 날개짓이 전부인 한낮의 텃밭. 나무는 불어오는 바람에 맞추어 부드럽게 이파리를 살랑거릴 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바쁘고 항상 시간에 쫓기고 머릿속은 아직 다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로 인해 실타래 만큼이나 복잡하게 엉키어 있을까.

    그러나 병상에서는 모든 것이 조용하다. 특별히 일어나 나가서 할 일이 없다. 지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도 없고 오늘까지 꼭 마무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도 없다.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거나,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어서 바쁘게 일했던 모든 것들, 직장인이 되고 살림을 살면서 분주했던 모든 일들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아무도 그들에게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 아무것도 지시할 수 없다. 자신의 몸을 향해 먹으라고 말할 수도 없고 자신의 다리에게 걸으라고 말할 수도 없다.

    병상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그래서 평화롭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인간의 모습은 순수하고 선하다. 어린아이의 모습이 순수하고 평화로운 것도 그들이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스스로 염려하지 않는다. 그들의 부모가 비록 가난하고 구차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아이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롭다. 우리도 하늘 아버지를 정말로 믿는다면, 그래서 “저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 저들도 하나님이 다 먹이고 입히시지 않느냐? 내일 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래서 “스스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도 평화로운 마음과 선한 눈길이 되살아날 것이다.

    우리는 어르신의 병환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속히 치유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병실을 나섰다. 이제 빨리 차를 타야 한다. 빨리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 빨리 저녁을 해 먹이고 빨리 준비해서 또 다른 곳에 빨리 심방을 가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아무리 동동거리고 염려해도 나는 내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도 검게도 못한다는 것과 그저 지금까지 은혜로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것이 너무 감격스럽다. 나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곳간 안에 들인 것이 없어도 세상 주관하는 주님 새를 먹여주시니 너희 먹을 것을 위해 근심할 것 무어냐” 찬송가 307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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