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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해 준 것이 무엇일까?

    비 한 번 내리면 봄이 성큼 다가오고 또 한 번 비가 내리면 봄이 더욱 가까이 다가와 있다.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펴고 바라본 거리에 저만치 목련이 우아하게 피어있고 벚꽃망울이 겨우내 죽은 것처럼 볼품없던 가지를 눈부시게 뒤덮을 때 문득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게 된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우리의 인생살이도 시간만 지나면 좋은 시절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날 동유럽이 공산치하에 있을 때 공산당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것보다 보모가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들은 모두 다 공장으로 내몰고 보모로 하여금 많은 아이들을 돌보게 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생명은 오래 가지 못했다. 보모는 정확한 시간에 유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쉽게 자신의 생을 포기했으며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영양실조도 아니고 피부습진도 없었는데 왜 아이들은 살아남지 못했을까? 사람에게는 먹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자라는 존재이다. 사랑이 없이는 아무리 먹이고 입혀도 사람답게 자랄 수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아온 것일까.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또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고 살아왔을까. 사랑은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버려진 인생이 아닐까’ 두려워하는 영혼에게 조용히 다가가서 소리없이 함께 하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버려진 인생이 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렇게 몸부림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은 아닐까.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버림받지 않고 인정받는 존재가 되려고 이를 악물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인생은 언제나 전쟁통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살을 맞대고 함께 살아온 사람들과 헤어질 때 과연 내가 그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2006년에 대학교 1학년을 마친 둘째 예린이가 한국말을 배우러 1년동안 한국으로 나갔을 때도 그랬다. 아이의 짐가방에 담겨있는 옷가지들을 보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동안은 예사로 생각했는데 막상 아이가 챙겨놓은 옷을 보니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윗옷도 소매가 다 낡았거나 너무 오래전에 산 티셔츠 나부랭이 뿐이었고 바지도 청바지 하나가 달랑 가방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도대체 내가 아이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었으면 아이가 무엇이 필요한지조차 모르고 살아왔을까. 네 아이를 기르면서 일곱 식구를 뒷바라지하며 교회의 사모로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날마다 허둥지둥 살다보니 아이가 무슨 옷을 입고 다니는지도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사실 나 역시 옷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아이는 언니 옷을 이것저것 걸치고 다녔기에 아이의 옷장이 그토록 빈약한지 몰랐는데 막상 집을 떠나면서 자신의 옷을 챙겨보니 가져갈 옷이 없어서 아이의 작은 여행용 가방이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난 엄마로서 도대체 아이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를 심하게 자책했다.

    이번에 큰딸 예랑이가 유학을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항에서 아이와 헤어지고 돌아오면서 엄마로서 내가 그 아이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큰딸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가 되게 해 준 소중한 존재였지만 내가 아이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였다. 물론 나는 아이를 픽업해주고 도시락을 싸주었으며 공부를 가르쳐 주었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아이 학교에서 자원봉사할 부모를 모집할 때에도 제대로 협조해 본 적이 없다. 동생들도 많아서 항상 자기 또래 친구들보다 할 일이 많았던 아이. 그래도 큰딸은 항상 나를 “베스트 맘”이라고 불러주었고 엄마를 존경한다고 격려해주어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이 세상에 와서 과연 내가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부모에게 어떤 자녀였을까? 내 남편, 내 아내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으며 나의 딸과 아들에게 나는 어떤 부모였을까? 그리고 나를 아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아있을까?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남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모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남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사랑이 필요없을 만큼 부요한 사람도 없다. ‘나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한평생을 힘들게 보냈다.’고 투덜거리거나 “나는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게 살았다.’고 히스테리컬하게 말한다 하더라도 가족들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날마다 사랑을 나누어주고 그 사랑으로 인해 쓰러진 누군가를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다. “한 가슴의 무너짐을 막을 수만 있다면 나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노래한 엘라자베스 브라우닝의 시(詩)처럼 말이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사랑만이 기적을 만든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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