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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낫기를 원하느냐?

    만약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환자에게 “당신이 낫기를 원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당할 것이다. 욕을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38년된 병자, 그것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정말 딱한 환자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한복음 5장)

    당시 예루살렘 양문(Sheep Gate) 근처에 베데스다(의미 :자비의 집)라는 연못이 있었다. 사람들은 천사가 내려와 연못물을 움직이게 할 때 가장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이런 연유로 수많은 환자들이 이곳에 매일 모여들었다. 눈먼 사람들, 다리를 저는 사람들, 중풍병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 그리고 38년이나 오래된 환자에게 물으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왜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셨을까?

    어쩌면 38년된 환자는 치유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날 수많은 종류의 환자들 중에는 자신의 질병으로부터 나음을 입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자신의 처지에서 회복되기를 원치 않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너무 오랫동안 경험했던 것이라 그것에 익숙해져서 새로운 삶을 선택하기를 주저하는 사람도 있다.
    약물중독, 알코올중독, 비만, 성중독자들을 대상으로 상담한 경험이 많은 스티븐 아트번의 말이다.
    현재 자신의 비정상적인 삶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약물중독자들의 경우 그들은 자신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중독 때문에 자신들의 인격이 황폐화되고 관계가 무너졌으며 결혼생활과 직업,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건강까지 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병든 상태에 남아있는 길을 선택한다. 중독이 주는 유혹과 자극과 느낌이 올바르게 사는 삶보다 훨씬 더 강력한 유혹이기 때문이다.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이 잘못한 것인줄 알지만 그 삶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 자신이 치유되기를 원하는 갈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보자.
    중독된 상태의 사람들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버려야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는 그 무엇에 연연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어쩌면 당신도 치유되기 보다는 지금 상태를 고수하기를 원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우리 앞에는 항상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는 숱한 병자들이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찾아가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멋진 옷을 입고 향수를 뿌리며 화려한 삶을 누리는 고위층의 사람들을 만나는 대신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난다는 연못가에 막연히 누워있거나 서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계시기를 좋아하신다. 보통사람들은 그런 곳에 가기를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곳에 계시기를 좋아하신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 내 곁에 계신다.
    또 한 가지는 내가 선택할 기회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물으실 때 “네! 주님, 낫기를 원합니다!”라는 대답을 할 선택의 기회가 여전히 내게 있다.
    당신의 병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형편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치유와 회복의 첫 번째 열쇠는 “내가 낫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선택에 있다.
    그리고 예수님, 그분과의 관계가 시작될 때 당신은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아 다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메기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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