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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 중에서도

    몇 년전에 교단신학교인 코람데오 신학대학원 학생들 중심으로 성경문화와 성경지리 탐방차 이스라엘과 그리스, 그리고 터키를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 우리는 터키 지역에 있는 갑바도기야를 찾았다. 갑바도기아는 신약성경 베드로전서 1장 1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기록된 곳이다. 갑바도기아는 그 지형이 특이해서 마치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그런 지형적인 특이함보다 내 마음에 더욱 인상적으로 남은 것은 “데린구유”였다.

    데린구유(Derinkuyu)는 “깊은 우물“이란 의미로 갑바도기아 근처에 있는 지역 이름인데 그곳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발자취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데린구유는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평범한 마을이었다. 그런데 한 곳에 가니 땅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바로 1세기 기독교인들이 오직 신앙을 지키기 위해 로마의 핍박을 피해 동굴을 파서 피신한 곳이다.

    안내를 따라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어두컴컴했다. 계단으로 이어진 통로는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았고 키가 큰 사람은 머리를 숙여야 했다. 또한 통로도 여러 갈래가 있어서 자칫하면 길을 잃을 것 같았다. 실제로 이 동굴은 8층으로 되어 있는데 오래전에 일본인 관광객이 이 동굴 안에서 길을 잃어 실종되는 바람에 터키 경찰이 한참동안 수색을 한 끝에 겁에 질려 어쩔줄 몰라하는 그를 찾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실종위험을 방지하여 4층까지만 관람을 하도록 조치를 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숙연한 마음으로 한 층 한 층 지하로 내려갔는데 가장 먼저 식당으로 사용한 곳에 이르렀다. 식당은 동굴 입구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환기 문제에 신경을 쓴 그들의 지혜를 볼 수 있었다. 햇빛 한 톨 들어오지 않는 곳, 먹을 것도 넉넉지 않고, 좁은 방, 그것도 돌로 된 차가운 방에서 언제 들이닥칠 줄 모르는 로마병사들을 피해 언제나 쫓기는 자의 심정으로 지내야 했던 어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거처했던 곳이었다.

    한 곳에 이르니 통로 가운데 연자맷돌이 있었다. 통로를 막는 장치였다. 로마병사들이 왔을 때 그들은 이 맷돌로 통로를 막았다. 그리고는 병사들이 물러갈 때까지 숨소리도 죽인 채 지내야 했다. 하루 이틀이면 괜찮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6개월 이상 군인들이 버티고 있으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먹을 양식 때문이다. 처음엔 감자로나마 세 끼를 먹다가 두 끼로 줄인다. 그러다가 한 끼를 먹고 그것도 안되면 굶어야 했다. 오랫동안 영양실조에다 햇빛을 보지 못하면 등이 굽는다. 그들의 모습이 희미한 실루엣이 되어 동굴의 이곳 저곳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우리는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다소 넓은 장소였는데 흥미있는 것은 십자가 모양의 공간이었다. 그곳은 바로 지하성도들의 예배처소였다. 그곳엔 아무 장식도 없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고난당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며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어제 이곳에 숨어지냈던 신앙의 선배들은 무엇을 놓고 기도했을까?
    “마라나다!” 이렇게 기도했을까?
    우리 팀도 그곳 한쪽 모퉁이에 서서 기도했다.
    나 역시 “아버지!” 하며 입을 떼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계속 울다가 기도를 마쳤다. 어제 우리의 선배들이 너무 고마웠고 감사했다.
    그들 역시 따뜻한 햇살이 그립고 자식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황제 시저는 나의 왕입니다.” 라고 말해야 살아남는 세상에 살면서 “주님만이 나의 왕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들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포기했고 고난 중에서도 믿음을 잃지않고 꿋꿋하게 세상과 싸웠던 것이다.

    성 어그스틴은 “하나님의 도성 (the city of God)”이란 글에서
    ”고통이란 동일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이란 있고 고통은 동일한 것이지만 고통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모독하고, 선한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고 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떤 형태의 고통과 고난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내란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야 할 목적과 사명을 계속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가 박해 중에서도 믿음을 지킨 이분들을 두고 편지한 내용이 생각나면서 나 역시 결단하는 마음이 되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베드로전서 1장5-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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